처참한 시작

입소

2023년 2월 27일 월요일, 카이스트 문지캠퍼스에 도착했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들도 있고, 이전 기수분들이 인터넷에 썼던 글들도 읽어봤기에 힘든 과정이 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5개월을 지낼곳을 둘러봤다. 도착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만 짐이 너무 많은가, 내가 나이가 많은 편인가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SW사관학교 정글 이전에 내가 한 코딩 경험은 딱 한번이었다. 학교에서 생물통계학 시간에 교수님이 가르쳐줘서 한 학기 동안 쓰던 R이 전부였다. 사실 그 수업은 이전학기 수업인 유전학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듯 했는데, 난 유전학을 듣지 않았기에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R을 배우랴, 유전자와 관련한 논문을 해석하랴 정신을 못차렸다. 학기 중반부턴 그저 포기하고 F만 면하길 바라며 출석했다. 딱 한번뿐인 경험이었지만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코딩공부라고 생각했었다.

준비하던 시험을 탈락하며 포기하고 이후 빠르게 취업했지만 일주일만에 퇴사하였다. 내 나이는 29인데, 20대를 되돌아보며 종합해볼 수 없었다. 긁어모을 것이 없었으니까. 그저 놀고, 게임하고, 학교에 출석해서 듣는둥 마는둥. 그나마 열심히 공부한 시험은 3년 동안 1차도 붙지 못했다. 29살의 나는 9년동안 발전하기는 커녕, 그나마 있던 열의조차 없는 퇴보한 사람이었다. 1년동안 취준을 하며 고민했다. 무엇을 해야할까. 세상에 재밌어서, 좋아서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 그래도 버틸 수 있는, 보람은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싶었고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찾아보고 생각해봐도 ‘지금 내가..?’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내가 할수 있을까?’, ‘이게 맞는 길일까?’. ‘여기서도 실패하면 난 어떻게 되는걸까?’ 스스로에 대한 의심만 가득했다. 어느새부턴가 미래를 고민하지도 않았던것 같다. 고민하면 과거에 대한 후회, 자괴감, 부끄러움, 온갖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차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서 외면했다.

30이 코앞에 다가오던 즈음 1기로 정글을 다녀왔던 친구가 곧 전형이 시작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지원했다. 뭐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좋은 과정이고, 좋은 기회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은 개발자 커리어의 기준이 아니었고 내 인생이 기준이였다. 이 기회를 놓치고 이보다 나은 계획을 세워 실천하는 것은 내가 할 리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을것이라 생각했다. 찬찬히 인터뷰, 기사, 후기, 홈페이지를 읽어보았다. 정글의 핵심 키워드가 ‘몰입’이라고 느꼈다. 단기간 빠르게 학습하고 성장하기 위해 집중력있는 기간을 보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 또한 깊히 공감했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자며 고생했기에 수험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 변리사 시험이 스스로를 여러 끈들을 놓지 못한채 미련을 두었기에 실패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몰입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합격하고 싶다는 생각이 급격히 커져갔다. 다시 한번 나를 몰아붙이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매정하게 채찍질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 혼자서는 해낼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붇는 경험을 다시한번 절실하게 느끼고 싶었다.

2주간 입학시험 공부기간이 주어졌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책상에 앉았지만 오래 집중하지 못했고, 여러번 봐야하는 걸 알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전히 게으르고 나태하고 자만했다. 책상에 앉아있었던 시간의 절반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시험을 보며 그리 처참한 기분은 안들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내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부족한 결과보다, 할 수 있었고 충분했다고 생각해놓고 이루지 못한 것에 속상했다. 마음을 비우고 불합격을 예상하며 담담한척한 하루가 지나고 1차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을 홈페이지로 확인했다. 근 몇년 중 가장 기뻤고, 정말 행복했다.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면접 준비를 했다. 면접에서 말을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옆분들이 이 공부에 얼마나 진심이고 노력해왔는지가 느껴져서 스스로 초라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뿐이라 씁쓸했다. 그리고 다음날 최종 합격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라면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입소까지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근데 마치 나는 원하던 대학에, 회사에 합격한것 마냥 살았다. ‘어차피 가면 죽어라 해야해!’라는 생각으로 자기합리화 하면서. 입소할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며 그저 가서 열심히해야겠다는 의미없는 다짐만 했다. 마음속 깊이는 ‘내’가 하는게 아니라 ‘정글’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줄것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그리고 이 태도는 입소 첫날부터 나에게 처참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점심에 입소하고 방 청소를 마친 후 모두 한 곳에 모였다. 그리고 목요일까지 미니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당장 화요일 아침 주제와 계획에 대한 간략한 발표가 있었다. ‘첫날부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두가 하기에 나도 했다. 하지만 기획단계에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는게 없었으니까. 입학시험때 공부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준비해야하지만 그것조차 익히지 못한 나였기에 팀원들의 의견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해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운영진분들이 보기에는 도토리 키재기지만, 나에게 다른사람들은 훨씬 아는게 많은 똑똑한 사람들로 보였고 나 스스로가 그렇게 초라해보일 수 없었다. 내가 도움이 되기는 커녕, 1명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었다.

나에게 한번 더 천운이 따른건, 첫 0주차 미니프로젝트에서 만난 팀원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알아야 할것을 모르는 내가 답답했을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답답하고 한심했다. 하지만 친절히 알려주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해주고 내가 질문하면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미안해서 내가 말을 못걸때도 먼저 손을 건네주었다.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그것을 나아가고자 하는 추진력으로 쓰게 된것도 팀원들 덕분이다. 다른사람은 4일짜리 홈페이지 하나 만드는 일에 의미부여가 지나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은인이고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흘동안 열심히 했고(100%는 아닌것같지만) 어제보단 나은 오늘의 내가 됐다. 여전히 갈길은 멀고 배워야 할것은 끝이 없지만 첫 출발이 좋아 기쁜 마음이다. 여전히 내가 그 팀에서 많이 부족했고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어 다행이다. 내가 내 할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팀원이었던 두 사람에게는 꼭 갚을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입소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잠도 평상시에 절반도 못자고 아침부터 밤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공부하고 연습하는 신세지만, 행복하다. 성실하게 노력한다는 것이, 더 나은 내가 되고자 하는것이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한 일인지 느끼고 있다. 그리고 기초과정이라 그런진 모르지만, 코딩이 정말 재밌다! 아직 부족하고, 당장 오늘도 새로 배운게 많지만 이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걸그룹 브레이브 걸스가 역주행 했을때, 몸이 편하고 마음이 힘든것보단 몸이 고되더라도 마음이 편한게 훨씬 낫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맞는 말이라곤 생각했지만 공감하진 못했다. 그런 경험이 너무 오래 전이라 나와는 먼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고작 일주일이지만 조금은 알것같다. 자고 일어나도 졸리고, 눈이 아파도 공부해야 할 것은 산더미지만 행복하다.

운영진분들과 티타임때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내가 나의 기준이나 신념,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을 고려하며 어떤 개발자로 나아갈 지를 몰랐기에 질문했다. 그분들은 아는게 없으니 당연하다, 지금은 하루,매주 주어진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어느정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능력과 지성과 자격을 갖춘 분들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다. 고민하고 혼란스러운 지금의 내가 잘못된게 아니라는 것을. 프론트엔드, 백엔드, 엔지니어, 좋은 회사, 좋은 직책, 연봉은 지금은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설령 알아도 내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이번주에 풀어야 할 문제, 읽어야할 책, 만들어야 할 과제에 집중하고 생각하는것이 지금으로서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훨씬 가치있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공지에서, 이 에세이를 정글 과정이 끝난 후 다시 보게 될것이라 한다.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은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장병규 의장님이 티타임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저 내가 뭘 잘하는지는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고 , 기능을 구현하고, 작업해내는 능력보다 무엇이든 도전할 능력을 지니고 싶다. 기초적이지만 중요한 지식을 갖추고 어제보다 +1이라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게으름, 나태함, 자만이 얼마나 유독한 지 명심한채로 있고 싶다. 그리고 5개월 후 이 곳을 나가 커리어를 시작할 때,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보단 무엇에 도전하고 미칠지 고민하는 나이길 바란다. 지금의 진심어린 절실함이 5개월 후의 나에게도 여전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내일의 내가 초심을 잊지 않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