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독후감

공정하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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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마이클 샌델 지음

출판사 : 와이즈베리

감상

능력주의는 진급, 승진, 포상 등 집단 내에서 이익을 분배할 때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 능력주의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많은 노력이 소모되고 있다. 그런 면에 익숙해져있다보니, 능력주의를 정답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느정도 모범답안이 될 순 있겠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밀고 당겨주는 불합리함보다는 훨씬 나은 것은 분명하다.
나름대로, 능력주의에 있는 결함에 대해 생각을 하곤 했었다. 예컨대, 모든 수험생이 한날 한시에 같은 시험을 보는 수능은 능력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제도다. 국가적으로 철저히 보안을 신경쓰고, 철저히 원칙을 적용한다. 재벌가의 자녀들조차 재수를 하는걸 보면 납득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날의 컨디션, 건강이나 사고 등 예측할 수 없는 변수는 존재하겠지만, 천재지변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수능은 완벽히 공정한가? 백만원이 넘는 과외를 받는 학생과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해야하는 학생이 공정한 절차를 치뤘다고 볼 수 있는가? 아픈 가족을 돌보는데 매일 시간을 써야하는 학생의 불리함도 천재지변으로 어쩔 수 없는 요인이라고 해야할까? 사실 이 문제는 이미 사회적으로도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 문제다. 그 떄문에 특정 조건의 학생들에게 학습 자료를 제공한다거나, 입학 전형을 분리해서 적용한다. 가정에 경제적 지원을 복지로 제공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정말 최선을 다하여 공부했다고 자신할 수 있지만 내가 무능을 노력으로만 이겨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수능을 보기 위해 필요한 재능을 어느정도는 타고났다. 공부에 대한 재능은 아니다. 그랬다면 변리사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을까? 내가 언어를 잘 못했고, 6등급인 물리를 1등급으로 만드는데 3개월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좀더 세분화되있는 재능으로 생각해야 한다. 유머글이지만, 페이커가 시대를 잘 태어났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롤드컵 4회 우승이 불가능했다는 내용이었다(물론 나의 빛 나의 사랑 대상혁은 뭘 해도 성공했을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수 만년 전 구석기시대에서 태어났으면 재능을 인정 받았을까? 지금은 이 재능이 대학 졸업장으로 변해 나의 가치를 뽐내는 데 정말 좋은 근거가 되어준다. 하지만 구석기 시대에서 수능 과학탐구 성적을 올리는 재능은 어떻게 인정받을 것인가? 더하기를 못해도 더 빠르게, 오래 달려 사냥을 잘하는 사람이 더 중요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그 시대에 사냥의 결과물을 능력주의로 분배한다면 난 내 밥벌이는 제대로 했을까? 이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 내 결론은 “어떻게 완벽히 공정할 수 있겠어?”

이 책에는 이에 관한 고민이 나온다. 왜 그런 고민이 필요한지, 부족하여 발생한 현재의 사회 현상을 보여준다. 부의 양극화, 지나친 학력주의, 대학이라는 고등 교육 기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주제들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정치적 포퓰리즘의 원인일지 모른다고 이야기된다.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했다.
나만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포퓰리즘이 자원을 고려하지 않은 복지정책을 남발하여 당선되려는 좌파의 술책쯤으로 여겨진다. 내 정치적 견해를 밝히자는 건 절대 아니다. 포퓰리즘은 좌,우 모두에서 나타난다. 좌에선 복지 정책의 형태로 나타나고 우에선 자국민 우선주의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파리 기후변화 협정을 탈퇴하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며 자국 기업을 최우선시 했던 트럼프의 미국, 브렉시트로 유럽 연합을 떠난 잉글랜드 모두 보수의 포퓰리즘으로 나타난 결과다.
능력주의는 완벽한 가치인가? 부작용은 무엇인가? “그래서 뭘 어쩌자고?” 라는 생각으로 책을 펼치지 않길 바란다. 인문학은 수학 문제집 답안지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최우선으로 생각해야할 가치는 무엇인가? 내가 생각해야 할 다음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었다.

기억에 남는 구절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능력주의 이념에 찬성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신념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또 더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 문제도 외면한다. 승자들 가운데, 그리고 패자들 가운데 능력주의 윤리가 부추기는 도덕적으로 좋지 못한 태도의 문제다.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을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민자들이나 아웃소싱에 대한 반항 차원을 넘어, 포퓰리즘의 불만으 능력주의의 폭정을 향한다. 그리고 그 불만은 정당화된다.

“공정한 능력주의 제도를 마련하자”, “사회적 위치가 재능과 노력을 반영하게 하자”며 되풀이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성공(또는 패배)을 해석하는 방식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 재능과 노력을 보상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건, 승자들이 승리를 오직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게끔 한다. 그리고 그보다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깔보도록 한다.

주류 정당과 엘리트는 이러한 정치 차원을 놓치고 있다.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에는 단지 ‘분배의 정의’ 문제만 따라온다고 여긴다. 세계 무역과 신기술, 경제의 금융화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포퓰리즘의 불만과 기술관료적 통치의 실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정치 담론을 이끌어갈 때 마치 사장에서 아웃소싱하듯 도덕과 정치 문제를 젖혀 버리거나, 전문가와 기술관료에게 온통 맡겨 버리면 되는 듯 해왔다.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40년 동안 꼐속되며 정치 담론의 장을 공동화했고, 보통 시민들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포퓰리즘의 반격을 촉발했다. 그 반격이란 텅 비어버린 공론장에 무자비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민족주의를 채워 넣으려는 움직임이다. 민주정치가 다시 힘을 내도록 하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보다 건실한 정치 담론을 찾아내야 한다.그것은 우리 공통의 일상을 구성하는 사회적 연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능력주의를 진지하게 재검토함으로써 가능하다.

은총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도덕 세계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 마틴 루터 킹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상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10.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신들이 간통을 저지르거나 실수를 했다는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아동들에게 학스하면 신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질 것이므로 그런 내용을 교육에서 삭제하고 가르쳐야 하며, 이를 "고귀한 거짓말(Noble lie)"이라고 불렀다.

능력주의가 나아갈 이상에 대한 야심을 나타내면, 패배자는 시스템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주어지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패배자는 스스로를 비난하도록 요구받게 된다.

12.

능력주의적 오만의 갖아 고약한 측면은 학력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13.

이것은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14.

교육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권고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의 집단이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될 위험성을 키운다.

15.

교육을 개인의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16.

한때 기회의 문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대학 학위는 이제(적어도 일부에게는) 학력주의자의 특권과 능력주의의 오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오로지 교육만이 불평등의 해답이라 하는 사회적 상승 담론은 부분적으로 비난받는다. 대학 학위가 품격 있는 직업과 사회적 명망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근거로 정치를 하니 민주주의는 훼손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생각은 비대졸자의 사회적 기여를 폄하하며 사회의 저학력 구성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긴다.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를 대의정부에서 효과적으로 배제한다. 그 결과 정치적 반격을 겪는다.

17.

민주사회를 통치하려면 반대 의견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반대에 직면하며 통치하면 어떻게 그런 반대가 나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려면 어떤 공적 목표를 달성해야 할지도 궤뚫고 있어야 한다.

18.

기술관료적 접근을 정책에 쓸 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정책 결정권이 소수 엘리트들에게 돌아가고 그만큼 일반 시민은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냉전 붕괴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를 기준으로 삼고 그 제도와 관행을 따라하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일었는데, 미국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이를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 라고 불렀다.

20.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한다.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21.

기술관료적 입장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약점은, 그것이 겉보기로는 잡음의 여지가 없는 가치중립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22.

사회적 이동성이 완벽한 사회는 두 가지 점에서 이상적이다. 첫째, ‘자유’의 아이디어가 일정하게 충족된다. 우리 운명은 태어난 환경에 속박되지 않으며 우리 손에 달려있다. 둘째, 우리가 성취한 것은 우리가 얻을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23.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24.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첫째,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다. 두 번째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거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25.

가장 잘 달리는 주자에게 납이 들어간 신발을 신길 필요는 없다. 마음껏 전속력으로 달리게 하라. 다만 그의 승리가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한다. 재능 있는 이들이 그 재능을 한껏 갈고 닦도록 하라. 그러나 그들이 받는 보상이 시장에서 부풀려지면, 그것은 공동체 전체와 나눠가져야 한다.

26.

롤스는 독특한 재능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을 ‘차등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재능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능이 시장 사회에서 거둔 성과를 능력이나 자격을 내세워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것으로써 능력주의와 구별된다.

27.

여기에 능력주의자는 이렇게 답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연적 재능이 행운의 산물이라 해도, 우리의 노력은 순전히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얻은 것을 온전히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면 롤스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노력을 하려는 의지 자체도, 그러한 시도도, 그리고 흔히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근거한 것이다.” 노력조차도 ‘시장의 보상이 도덕적 자격을 반영한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28.

능력주의가 문제라면 해답은 뭘까?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로 옹호되어 온, 그러나 분노를 퍼뜨리고 정치에 해를 끼치며 사회를 갈라놓는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29.

이 쌍방향 폭력은 하나의 도덕적 원인을 공유한다. 능력주의의 금과 옥조인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도덕률이다.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30.

프랑스 사회이론가 에밀 뒤르켐은 헤겔의 노동론을 토대로 “노동분업은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이들은 공동체에 기여한 실제 가치에 근거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1.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 진다.

32.

사회적 복지는 응집과 연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일반 문화, 그리고 강력한 공동 이해관계 의식의 존재를 내포한다. 개인의 행복은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운 안락과 명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존엄과 문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함도 요구한다. 후자는 반드시 출세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

33.

제임스 애덤스는 미국 의회도서관을 가리켜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라고 말했다. 모든 삶의 영역의 미국인들이 자유롭게 와서 공공 학습을 할 수 있기 떄문이다. “일반 열람시을 보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1만 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자리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