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

독후감

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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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라프 코스터 지음

출판사 : 와이즈베리

감상

개발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떄부터, 언젠가 꼭 게임을 개발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굳이 직업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직업이 아니게 되면 훨씬 더 자유롭게 내 꿈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건 반드시 하겠다는 것이다.

페이커의 독후감 리스트에서 단번에 내 눈에 들어온 책이였다. 어떤 게임에서, 어떤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인가? 내가 워낙 쉽게 게임을 질려하는 타입이라 정말 수 백가지의 게임을 해봤다. 남들은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 까지도. 반면 남들이 다 하는 것,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봤을 법한(혹은 해야만 하는) 게임을 안한 경우도 있다. 나름대로 까탈스러운 구석이 있다 보니.. 이 책을 읽으면 내가 어떤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 했다.

처음에는 게임의 정의에 대해 논한다. 무엇이 게임인지, 게임은 어떤 형태로 진화되어 왔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게임이 반도체로 작동하는 기계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게임은 결국 놀이이고 선사시대부터 분명 아이들은 놀이를 하고 놀았을 테니까. 그 이후론 게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결국,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나 또한 <라스트오브어스>에 너무나 진심이었기 떄문에 <라스트오브어스2>가 선사한 역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것보다, 닐 드럭만이라는 천재적인 게임 개발자가 가진 태도와 사상이 이해가 안됐다. 왜 게임이 계몽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가? 왜 미국과 유럽의 게임 업계는 흔히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절여졌는가? 이 책을 읽다보니 어느정도 이해가 됐다. 그게 옳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스탠스를 취하는 지를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게임이 예술로 인정 받을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지극히 동의한다. “게임이 예술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영화로 예술을 할 수 있지만 어벤져스가 예술은 아닌 것처럼, 어떤 게임은 예술로 받아들여 질 수 있고 다른 것은 유흥거리로 취급받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 어떤 형식, 어떤 가치를 지니든 게임이여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건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씁쓸하다.

영화 <로리타>를 보고 "영화는 소아성애를 주제로 하는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 주위에는 한심한 시선 뿐일 것이다. 조직 폭력배가 등장하고 사람이 무참히 죽어가는 영화가 출시되지만 영화의 존재가치를 논하지 않는다. 개봉되는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뿐이다. 다루는 주제가 아니라 가지는 의미를 봐야하는 법이니까. 게임도 같은 방향이 될 수 있을까?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선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기억에 남는 구절

코는 실제로 시야를 상당히 가리고 있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쳐다보면 뇌는 순식간에 코를 안 보이게 만든다. 도대체 뇌가 코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 답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바로 추정(assumption)이다. 두 눈이 제공하는 입력과 그 전에 보았던 것을 기반으로 그럴듯하게 구상해 낸 것이다.

당신은 아침 루틴을 자동주행모드로 진행한다. 아침 루틴 전체는 뇌에 청크되어 있다. 따라서 일부러 의식해야만 각각의 단계를 기억 할 수 있다. 아침 루틴은 뉴런에 각인된 기본적인 레시피이므로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뇌는 상관없는 것을 편집하는 일을 잘한다.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인식한다. 뇌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현실 세계를 숨긴다. 우리는 언제나 청크를 만든다.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청크가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곤경에 빠진다.

“꿰다(grok)”라는 단어는 매우 유용하다. 이 단어는 로버트 하인라인이 자신의 소설 <낯선 땅의="" 이방인="">에서 처음 만들어냈다. 무언가를 완전히 이해해서 하나가 되고, 심지어는 사랑하게 된다는 의미다. 직관이나 공감을 넘어서는 깊은 이해인 것이다.

몸의 매우 많은 부분이 자율신경계(autonomic nervous system)에 기반을 두어 작동하는데, 자율신경계란, 신경계가 자기 혼자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표현한 용어다.

이러한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는 과정을 우리는 ‘연습’이라고 부른다. 연구에 따르면 반드시 물리적으로 연습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머릿속으로만 연습해도 상당부분 물리적으로 연습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근육이 아니라 뇌가 대부분의 일을 한다는 강력한 증거다.

게임을 배우는 과정은 자동차 운전, 만돌린 연주, 7 곱하기 7을 배우는 과정과 같다. 우리는 기저에 깔린 패턴을 학습하고, 그것을 완전히 꿴 다음, 필요한 때 재사용할 수 있게 정리하여 보관해둔다. 게임과 현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게임에 걸린 판돈이 현실보다 적다는 것 뿐이다.

목표 지향적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특정 패턴을 인식하는 과정이고, 역할 놀이는 또 다른 패턴을 인식하는 것이다. 둘 다 “인간의 경험을 상징화해서 표현함으로써 패턴의 형태를 연습하고 학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같은 영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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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정교하게 게임을 만들수록 한계는 많아진다. 게임을 더 오래 플레이하도록 만들려면 해를 모르는 수학 문제를 도입하거나 인간심리학, 물리학 등을 활용해 더 많은 변수를 넣어야 한다(그것도 예측하기 어렵게 말이다). 이런 요소는 게임의 규칙 밖에서 발생하고, ‘마법의 원’ 밖에서 온다.

달리 말하면, 게임은 매우 원초적이며 강력한 학습 도구의 역할을 한다. 책에서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는 글을 읽는 것과 게임에서 내 군대가 상대방에게 박살 나는 상황을 만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게임에서 군대가 박살난 이유가 현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지도 때문이라면 실제로 수 많은 병사를 잃어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불행을 겪지 않고서도 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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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재미는 게임을 숙달하는 것에서 온다. 숙달은 이해로부터 온다. 퍼즐을 푸는 행위가 게임을 재미있게 만든다. 다시 말해, 게임에서는 학습이야말로 마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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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뇌가 새로운 경험을 갈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뇌는 보통 새로운 데이터를 갈망한다. 새로운 데이터만이 패턴을 갱신하는 데 필요한 전부다. 새로운 경험은 뇌의 시스템을 강제로 완전히 갱신시키므로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 방해되기 때문이다. 뇌는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애초에 청크를 만드는 이유다. 이것이 ‘감각 단절’에 반대되는 ‘감각 과잉’이라는 용어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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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는 머릿속에서 문제를 숙달하는 행위다.

미적 만족감은 언제나 재미있지는 않지만, 분명 즐겁다.

본능적 반응은 일반적으로 본능적인 신체 반응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신체적 숙련도와 관계가 있다.

다양한 사회적 지위 신호는 우리의 자아상과 공동체에서의 위상에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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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주관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전장은 주관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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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하면, 게임의 운명은 지루해져서 재미없어 지는 것이다.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두뇌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재미라는 과정의 종착역은 반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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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에게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 게임 디자인을 해서는 안된다. 동시에 디자이너는 너무 과한 수준의 기술을 요구하지 않도록 하는데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플레이어는 언제나 과제의 난이도를 낮추려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플레이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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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유일한 책무는 겡미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고, 그것을 가르치도록 게임을 만드는 것이다. 게임이 가르치는 한 가지, 즉 주제, 핵심, 게임의 심장은 많은 시스템이 필요할 수도, 혹은 조금만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의 모든 시스템은 이 배움에 이바지해야 한다.

게임은 닫힌 형식 시스템이므로 이와 같은 의미의 예술은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는 우리가 게임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지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크고, 복잡하며, 해석의 여지가 있으면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언가를 말이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게임과 상호작용하고 난 후에 다시 돌아와 기존의 도전에서 새로운 측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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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나쁘든 시각적 표현과 은유도 게임에서 사용하는 문법의 일부다. 게임을 설명할 때 우리는 형식적 추상 시스템만 가지고 설명하지 않는다. 전반적인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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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재미를 엄격한 시각으로 테스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래픽과 음악, 이야기 등 아무것도 없는 게임을 플레이해보는 것이다. 세상의 어떠한 양념도 양상추 요리를 칠면조 요리로 바꿀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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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벡터와 영역을 표시하는 표식에는 그 어떤 문화적인 요소도 없다. 항의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 항의는 전체적인 사용자 경험을 만드는 사람, 감독에 준하는 사람에게 전달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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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건설적인 행동은 역효과를 만들지 않도록 게임의 경계를 부드럽게 넓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로리타>, <호밀밭의 파수꾼="">, <지옥의 묵시록="">을 얻어냈다. 게임은 하나의 매체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권리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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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게임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우리 4면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도 있지만, 게임이 진정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우리 자신에 대한 통찰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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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게임에서 의미있는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있을 때 흥분하는 이유이며, 온라인에서 생선된 관계를 ‘현실화하는 것에 방어적’이 되는 이유다. 게임보다 평범한 수준의 만화가 인간의 조건을 더 잘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개선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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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대한 예술 작품은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작품은 식물을 특정 방향으로 자라게 하는 격자 울타리다. 그 속에는 의도가 깔렸고, 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달성하려는 어떤 목적이 있다.

27.

게임의 울티라로 플레이어를 보낼 때 우리는 오직 ‘재미있다’와 ‘지루하다’만 구분할 수 있다. 게임이라는 매체를 마스터하려면 작가의 의도를 부여해야 한다. 형식 시스템은 의도된 학습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게임은 이류 예술이며, 영원히 이류 예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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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즉 우리가 선택한 모양에 따라 플레이어를 자라게 하는 격자 울타리를 만드는데 있어서 장애물은 메커니즘 요소가 아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심리 상태, 자세,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근본적으로, 의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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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엔터테인먼트는 형태가 다른 게 아니라 강도가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