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회고록

한 해를 마치며

2023년 회고록

2023년이 일주일 남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특별히 체감되지 않기도 하고.. 내게 뜻 깊은 한해라 되돌아보며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꽤 오래 WIL을 쓰면서 회고를 반복해왔고, 근래에는 TIL을 쓰고 있다. 하루를 얼마나 바쁘게, 의미있게 보냈는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지나고나서보면 꽤나 다르게 보인다. 정확히는, 과거의 내가 꽤나 현명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예를 들어, 1번부터 5번까지의 선택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한다. 내 딴에는 열심히 고민했고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고 해도 나중에는 이해가 잘 안된다. “왜 정답인 4번을 냅두고 3번을 생각했을까?”, 혹은 “왜 6번, 7번 선택지는 몰랐을까?”. 심지어는 “그 쓸데없는 걸 왜 고민했을까?”까지도. 나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일이다. 꼭 더 나은 모습을 도출해내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게 변하기도 했고,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 참 많았다. 개발자가 되기로 마음 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명목상으론 두번째지만, 처음 내게 의미 있는 회사에 취직하여 일을 하고 있다. 유난 떨긴 싫지만, 처음 30대로 지낸 한 해기도 했다. 남들은 30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올해 스스로 열심히 되새겼다. 이제 ‘30대니까 잘 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더 늦으면 안돼’ 같은 말들을. 스스로 겁을 주거나 희망, 가능성을 꺾지 않고, 노력을 위한 채찍질의 재료쯤으로 쓴 주문이다. 그리고 도움이 꽤 많이 됐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자기최면이 설득력있거나 그럴듯한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결국 내가 해야만 하는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니까. 30년을 살아오면서, 열심히 하지 않았던 때는 늘 대단한 동기부여나 심경 변화를 위한 극적인 계기가 없는 탓을 했다.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줄 무언가가 없다는 핑계. 하지만 최선을 다했을 땐 그냥 했다. 말 그대로 ‘그냥 해야하니까’.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필요가 없으니 신경쓰지 않았을 뿐이다.

올해가 시작될 때, 내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 지 모르겠다. 모순적인 백수라고 해야되나.. 재작년, 4년을 준비한 시험에서 실패만 반복하다 포기했다. 4번째 도전을 4개월 앞두고 그만뒀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20대의 절반을 쏟아부었고 공부하겠다고 부모님께 받은 용돈과 책값이 수천이지만 신중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포기한 것에 아깝지 않을까?’, ‘내가 떨어진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라는 당연한 자문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단 살아야겠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겠다. 고시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기분이었다. “나 이제 뭐해야하지?”. 그래서 나는 전공을 살려 취직하기로 했다. 첫번째로, 나에게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거라곤 대학 졸업장뿐이니까. 남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자격증이던 인턴이던 열심히 쌓아왔다. 나도 그 시간에 내가 하고싶은 것을 준비했다. 차이점은 난 실패했다는 것. 그러니 이젠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가장 빠르게 취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공인 식품 기업으로 취직하려고 했다. 직무도 가장 정직한(?) QA로.

두번째는 일단 취업을 하면 그 다음 길이 보일 거라 기대했다. 용돈을 받는 입장에서 배부른 소리겠지만, 친구들이 월급을 받을 때 용돈으로 사는 게 여러모로 쉽지 않다. 정해진 돈으로 너무 규칙적인 삶에 갇혀 사는게 지겨웠다. 담뱃값과 버스비, 밥값을 뺴면 내 재량으로 쓸 수 없는 돈이 거의 없었다. 정해진 예산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힘들었고, 그런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조차 내 자신이 너무 나빠보이고 철 없다고 느껴져 자책했다. 그래서 돈을 벌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돈으로 내 생활을 하면, 아무 압박감 없이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지.

운이 좋게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열흘만에 나왔다. 우선, 얘기했던 근무 조건과 달라서. 공고에 없던 3조 2교대 근무에 투입되어서. 이런 중대한 변경사항이 사전 협의 없다면 앞으로는 더 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대 근무 자체도 자신 없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입사 직전까지 걱정이 많았다. 전공에 흥미가 없기도 했고, 성적도 안좋아서 대학에서 뭘 배웠냐는 물음에 답할 게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했을 떄보다 무식하면 무식했지 더 나아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가서 할 수 있는게 없을까봐, 배워도 잘 못할까봐 걱정됐다. 막상 가서는 정반대의 생각이 들었다. “왜 전공자를 뽑았지..?”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작 몇일만에 모든 일을 다 파악하진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하게될 일이라고, 보라고 건네준 자료는 그랬다. 전공지식이 없어도 되겠다. 그런 일을 60까지 해야돼? 이게 내 남은 인생의 절반을 차지할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뒀다.

그때부터 참 복잡했다. 뭘 해야할지, 뭘 할 수 있을지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다. 하고 싶은 것이 없어 뭘 할지 몰랐다. 무엇이든 해야하지만, 더이상 실패해서 시간을 낭비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겁에 질렸다. 실패가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시간을 낭비했다. 생각할 수록 상황이 암울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일에 대해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허비한 채 올해를 맞이했다. 그 때, 친구가 권한 부트캠프에 지원했다.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개발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내가 흥미와 적성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문득,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행히도 난 들어갔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HTML도 모르던 놈이 꼴에 Pintos도 맛보고, 프로젝트 발표도 해보고 나왔다.

정말 정말 힘들었고, 감사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많이 느꼈고,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이 배우고 반성했다. 그곳에서 모든걸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마음덕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어느덧 나는 매일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루틴으로 가득 찼다. 매일 아침 15분간의 명상으로 내 감정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를 가장 크게 바꾼 습관이지 않을 까 싶다. 내 몸의 감각이 어떤지, 내가 어떤 잡생각을 하는지 귀 기울이는 것은 훨씬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내 삶의 태도를 바꿔준다. 매일 20 분의 독서로 개발 이외의 분야에서 지식과 감성을 얻는다. 매일 알고리즘 문제를 풀고, TIL을 작성하면서 하루를 되돌아본다. 담배를 끊은지는 9개월이 넘었고, 살다보니 달리기에 재미 붙이는 날도 와버렸다. 내 블로그의 게시글은 350개가 넘어간다. 올 한해 내 스스로 바뀌었다고 느낀 것은 대단한 지식을 얻어 큰 발걸음을 옮겨서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간 덕이 아닐까 싶다.

Computer Science를 잘 이해한 개발자가 되는 것이 목표고, 언젠가 사람들을 즐겁게 할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다. 요즘은, 글 잘 쓰는 개발자가 되자는 생각이 든다. 결국 사람들을 위해 기계에 일을 시켜야 한다. 기계에게 일을 잘 시킬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개발자가 정말 좋은 개발자가 아닐까 싶다. 기계를 아무리 잘 다루어봤자 다른 사람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일까. 그 작업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그래서 요즘엔 참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이것 저것 공부도 하고싶고, 책도 읽고 싶고, 개발도 더 하고 싶다. 회사 일도 재밌고, 개인 시간을 쪼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재밌다. 당장 1월부터는 더 다양한 걸 차근차근 시작해 볼 예정이다.

처음엔 시간에 따라 한 해를 돌아보려 했는데 너무 구차하고 많아질 것 같아 그냥 생각의 흐름대로 적어버렸다. 다시 읽어보니 글 솜씨는 별로여도, 만족은 한다. 최근에 문득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요즘 행복하다는 말을 했다. 친구도 놀란 눈치고, 나도 놀랐다. 내 입에서 행복하단 말이 나온게 도대체 몇년만인지… 30대의 출발이자 새로운 진로의 첫걸음으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 고생많았다. 100점은 아니겠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을까.